한국전쟁 초기 전차격파 무기 (T-34/85 vs. 2.36인치 바주카)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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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초기 전차격파 무기 (T-34/85 vs. 2.36인치 바주카)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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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초기 전차격파 무기 (T-34/85 vs. 2.36인치 바주카) 분석 

 

한국전쟁 초기 전차격파 무기 (T-34/85 vs. 2.36인치 바주카) 분석
 

한국전쟁 초기에 (접착식) 급조폭탄으로 자주포를 포함한 적 전차에 육탄으로 돌격했다는 일화는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만,

오늘 이야기 하려는 주제는 3.5인치 슈퍼 바주카가 보급되기전 한국전쟁 초기에 대전차 무기로서 적 전차를 격파한 사례에 대해서입니다.


한국 전 초기에 35톤 짜리 북한군 T-34/85에 고전하게 된 이유가 

마땅한 대전차 화기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국군 모 장군도 그의 회고록에서 

"연대에 대전차중대가 배치되어 있었으나 57밀리 대전차포와 2.36인치 바주카포는 소련제 T-34형 전차의 두꺼운 장갑을 뚫지 못했다. 특히 대전차중대가 철판 관통력이 큰 철갑탄을 보유하지 못했던 것이 치명적이었다. 더구나 병사들은 전차를 본 적도 없거니와 대전차훈련을 한번도 치러 본 적도 없었다. 병사들은 첫날부터 소위 '전차공포증'에 시달리게 됐다. '전차'라는 말만 들어도 겁에 질려 사기를 잃어버리는 증상이었다....... 전차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전차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 무서운 것이었다." 라고 했습니다만,


아주 특이한 예로 1950년 6월 26일 의정부 지구 축성령 전투에 2사단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고 포병학교 제 2교도대대장 김풍익 소령(중령으로 추서-포병의 군신으로 불림)과 장세풍 대위(2포대장, 소령추서)가 결사대를 이끌고 5문의 105mm 야포를 직접 조준사격으로 북한군 3사단 전차 40여대를 공격 한 후 산화한 일이 있습니다. '100여미터 앞까지 끌어들인 뒤 근거리 직접 조준사격으로 적 전차의 궤도를 명중시켜 파괴'하는 초유의 방법으로 적 선두전차를 격파하고 두번째 전차를 향해 발사하려는 순간 적의 포탄이 폭발하여 두 분 다 전사했죠.


헌데 관통력이 약한 57mm는 그렇다 치고, 

2.36인치 바주카 마저 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

단지 2차대전 이후 잉여탄약 관리부실과 한국군/미군의 대전차 교육 미비로 인한 훈련부족과 전장공포 때문 이였는지 궁금해졌습니다.


2.36인치 관통력이 약127mm(5인치)이고, 

제가 가지고 있는 데이터로는 

T-34/85의 장갑은 18-90mm 로 되어있습니다. 전면 60도 장갑은 45~47mm 이구요. 포탑은 75mm입니다. 

그렇다면 충분히 관통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탄약의 경우 이제는 확인이 불가능하고 수십미터의 근거리까지 접근해서 정확하게 탄도를 박아넣어야 하는 바주카의 경우, 한국군이나 주일미군이 훈련부족과 전장공포로 인해 훨씬 먼거리에서 부정확하게 명중한것만 보고 격파불가능으로 오인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 후에 나온 3.5인치 바주카의 경우 관통력이 280mm에 달하므로 훨씬 먼거리에서 다소 부정확하게 맞아도 관통이 가능했습니다. 이 3.5인치는 90년대 초반까지 한국군에서 대전차무기로 사용됐었습니다.


2.36인치 운용기록을 살펴보면 스펙으로 알려진 120야드 이내 유효사거리에서 

(실제로는 불과 몇 십미터 거리에서) 

제대로 발사를 했다고 하는데, 허위보고를 했을 거 같진 않고...


육전사연구보급회편에, "전차가 보병진지 앞으로 바싹 다가왔을 때 오리히 D. 코너 소위는 스스로 2.36인치 로케트포를 조작하여 사거리 14~15미터에서 전차 후면에 대해 계속해서 22발의 로케트탄을 쏘았다. 그러나 그것 역시 별로 효과가 없었다." 란 말이 나옵니다... 


원문을 살펴보면 코너 소위 혼자만의 사격이 아니라 바주카팀의 사격입니다. "Operating a bazooka from the ditch along the east side of the road, 2d Lt. Ollie D. Connor, fired twenty-two rockets at approximately fifteen yards' range against the rear of the tanks where their armor was weakest. Whether they were effective is doubtful."이고, 이때 사격한 것은 코너 소위를 포함해 약 3개 바주카 팀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올리 코너는 본래 스미스 대대 소속이 아니었지만 대대에 장교가 너무 부족해서 스미스 중령에 의해 강제 납치되다시피 했다더군요.


만약 2차대전에서 T-34/85 와 2.36인치 바주카가 붙었다면 T-34/85를 파괴시킬 수 있었을까요? 

실제 이 바주카포를 사용해 장갑이 더 두꺼운 독일전차를 잡아내기도 했습니다만...


육군대학 지휘학처 무기관련 자료실에 이런 설명이 있더군요.


As against the heavier German tanks, the 2.36" bazooka was not sufficiently effective against the rugged T34, arguably the best tank developed in WWII. The 2.36 could penetrate the T-34 armor, but only marginally , and could be defeated by the sloping, heavy armor surfaces. Unless firing from a flanking ambush, or catching the T-34 rounding a corner, the infantryman was faced with the 3.5in sloping frontal armor, and an 85mm gun. Actually, the 2.36 should never have been deployed in Korea, as the M9A1 and other 2.36" models had been withdrawn from service shortly after WWII, and nominally replaced with the M20, of similar design but with a larger rocket.


결론적으로 미군입장에서도 한국전에 대비만 철저했더라면 좀 더 현실을 인식하고 2.36인치 바주카를 

3.5인치로 일찍 교체해 지급했을 거란 생각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단순히 경사장갑 탓으로 돌리기엔... 좀 의문점이 남습니다. 그래서 좀 더 자료를 찾아 보았습니다. 


 

 










 

일단 차체측면에 대해서는 2.36인치로는 충분한 효과를 거두기 어렵습니다. 공간장갑 때문입니다. 

(현수장치 구조특성상, 의도하지 않은 공간장갑이 형성됩니다.) 


차체전면과 포탑전면은 관통력 부족으로 관통불가, 후면과 포탑측면만이 관통 희망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 부분들에 명중할 경우도 입사각이 좋지 않을 경우 관통하지 못하는 일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격파사례는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완전격파로 확인되는 것은 없는데, 돈좌 수준 이상의 전과는 30대 가까이 된다고도 합니다.)


스미스 중령 - 오산에서 북한군과 교전한 TF 스미스의 지휘관 - 의 1951년 회고에 의하면 "탄의 열화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기도 합니다. 어떻게든 관통 못 할 것은 아니지만 못 하는 사례가 대부분이었고, 그 이유 중에는 탄약의 열화 문제도 있었다는 얘기인데, 탄약 열화는 무시 가능한 수준이고 입사각을 포함한 전술문제와 더불어 근본적인 위력부족 문제가 핵심인 것으로 추측됩니다.


앞서 언급한 코너 소위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15야드에서 22발이나 두들겨 맞았는데 "멀쩡하다"는 근거는 없습니다. "맞았으나 효과는 불분명"이죠. 어쩌면 22발 중 명중탄은 없었을 지도모릅니다. 사실 엔진룸은 철갑탄이라면 몰라도 대전차고폭탄 피탄으로 확실히 기능정지될 만한 곳이 아니었고, 덤으로 그 직후 언덕을 넘자마자 52포병대대의 105mm HEAT 포격에 직접 노출돼서 전차들이 돈좌됐기 때문에 바주카가 제대로 전차에 피해를 줬는지 여부 자체를 확신할 수 없게 된 겁니다. 미군은 철수했고, 파괴된 전차들이 수리됐는지, 아니면 폐차됐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으니까요.


결론적으로 105mm 야전포도 전차공격에 참여했는데, 격파는 실패했습니다. 기동륜을 공격해서 기동저지 정도는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미스 대대의 교전사례에서도 2.36인치가 효과는 있었습니다. 정작 올리 코너 소위의 팀은 전혀 전과가 없다고 추정되지만, 함께 작전한 51포병대대의 지원자로 편성된 포대 호위병력이 바주카 4문을 사용, 한 대를 추가 돈좌시켰던 것으로 기록됩니다. 물론 격파는 아닐 것으로 추측되긴 합니다만.


만약 유럽전선에서 (대전차 훈련의 변수는 있지만) T-34/85 와 2.36인치 바주카가 붙었다면 파괴시킬 수 있었을까...


가능은 하지만 적절한 관통력을 발휘할 만한 조건으로 명중시키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으로 봅니다. 매우 좋은 입사각 - 전차 좌우측으로 15~20도 범위 내, 거리 50~100m 이내 - 이라는 조건을 만족시켜서, 겨우 가로세로 1미터짜리 표적에,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는 로켓탄을 명중시킨다는 건... T-34/85를 상대하려면 대전차고폭탄의 경우 180mm 이상의 관통력을 확고히 확보할 수 있는 무기가 필요합니다.


전후 회고담을 보면 미군 바주카에 대해 공수부대는 아주 치를 떠는 대목이 나옵니다. 판터에 대해서 충분히 유효하지 못했다고 말이죠. 발지전투에서는 상당한 전과(그래봐야 10대 선입니다만)를 올렸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외에는 미 보병과 독일 기갑의 교전 자체가 많지 않아서 검증이 다소 어렵다고 할까요.


미군은 2차대전 시절부터 보병이 전차를 직접 상대하기 보다는 그에 적합한 구축전차나 항공기의 지원을 요청하는 쪽이 더 나았기 때문에 보병의 대전차 화력 쪽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독일이 굳이 바주카를 카피해 판저슈레케를 만들면서 88mm로 구경을 높인 이유가 달리 있는게 아닙니다. 확실히 T-34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주려면, 앞서 말한 것처럼 관통력 180mm 수준이 필요한 탓입니다. 명중시 효과를 생각하면 판쩌슈레케보다 판쩌파우스트가 훨씬 낫고 말이죠.


2.36인치가 화력부족인 건 맞지만 아주 못쓸 물건은 아니였고, '운용하기에 따라선'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도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상당한 전과를 거두긴 했지만 당대에도 위력부족으로 비판을 받았고 - 노획차량에 대한 실사실험 때에는 위력이 충분하다는 평가였지만 - , 한국전에서는 "확실히 위력이 부족했다"는 사실은 변화가 없습니다.


1980~90년대 군생활을 하신 분의 경험을 보충해 보자면, M9A1바주카의 로켓탄인 M6 로켓의 구조상 아무래도 부식의 영향도 있지 않았을까도 추측해 볼 수 있긴 합니다. M6 로켓의 신관은 탄두의 앞이 아니라 뒤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신관의 정비불량에 따른 노후화로 맞아도 폭발하지 않은 경우입니다. (혹은 지연폭발) 군생활 당시 90mm HEAT탄은 불량률이 20% 정도 되었던 걸로.. 탄이 아주 오래되서 갈색빛을 띄었는데 결국 전부 모아서 폭파시켰답니다 충격식 신관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불량률이 아주 높았던 걸로 기억하시더군요.


한편 한국전쟁에 참전한 프랑스군 대대는 공병중대에서 대전차 화기를 많이 운용했는데, 75mm 무반동총으로 파괴된 T-34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사격해본 결과 꽤 만족했다는 얘기는 있습니다. 보통 성형작약탄은 구경 영향을 많이 받으니 탄두 큰 것을 날릴 수 있는 녀석이 관통력에서는 더 낫긴 합니다. 그런데 정작 같은 75mm 무반동총의 운용에서 미군은 전혀 만족하지 못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죠. 오히려 57mm 무반동총 쪽이 더 낫다고 판단했던 징후마저 보입니다. 어차피 정면에서는 둘 다 못 뚫는데, 그나마 57mm 쪽이 더 가볍기라도 해서 그랬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57mm 무반동총은 T-34전차에 대해서 이미 전면과 측면공격은 어렵다고 결론이 났었고, 다만 2인 1조로 근거리에서 철갑탄을 사용, 전차의 하복부를 집중공격해 관통시켜 기동을 정지시킨 사례는 있습니다.


북한군은 개전 초기 전차를 242대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남진기간 및 교착기간 동안 추가적으로 150대 가량의 전차공급을 받았다고 보입니다. 그리고 같은 기간 239대(비파괴상태 유기 59대 포함)가 파괴됩니다. 그 외에도 파손되어 후송처리된 전차도 상당히 많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실제로 1950년 9월 현재 38도선 이남에서 "가동 가능한 북한군 전차"는 수십대 이하로 줄어 있었습니다.


이를 분석하면, 항공기에 의한 파괴(네이팜탄이나 기타)가 102대 (42%), 전차포가 39대 (16%), 로켓포(주로 3.5인치)에 의한 게 13대 (5%), 육탄공격, 조종실수, 고장에 의한 파괴가 26대(11%), 지뢰에 의한 파괴는 없습니다.


위의 기록은 기본적으로는 "전차가 파괴될 때 마지막으로 받았던 일격" 기준의 정리이고, "실제 전차 격파에 핵심적으로 기여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다른 수단입니다. 1952년에 집계된 256대 파괴전과 중 전차포 97(37.9%), 북한군 유기 63(24.6%), 로켓포 및 무반동총 35(13.7%), 항공기 29(11.3%), 포병 28(10.9%), 수류탄 3(1.2%), 미군 지뢰 1(0.4%)순으로 이어집니다.


출처는 국방과기술 2007년 6월호 논문, 실 보고서는 1952년 7월 2일자 보고서, U.S Armor in the Anti-Tank Role, Korea, 1950 pp.15입니다.

상대적으로 미군전차는 130여대 정도를 잃었는데 실제 대전차전이나 다른 요인 보다 지뢰로 인한 피해가 무척 높았습니다.


여기까진 공식 기록, 집계인데... 

초기 투입된 북한군 전차 대수 문제도 좀 논란이 있었습니다. 원래 초기 투입전력이 150대선이란 설도 있습니다. 


북한군이 초기 운용한 전차전력이 1개전차여단, 1개 독립전차연대(105여단의 전차연대였다는 설도..)인 걸로 보는 사람도 있는데, 모두 합쳐도 200대는 넘지 못했을 거라고 보는 거죠.


개전 당시 105전차여단(서울함락 이후 전차사단으로 개명)의 편제에 불확실한 점이 있기도 하고, 제 16기갑여단(사단?)과 제 17기갑여단(사단?)의 경우 전후 관계나 단대호, 부대규모도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 하는데요. 


'6.25사변 육군전사 제2권'을 보면 개전 당시 북한에 1개 전차사단과 2개 기계화사단을 보유했다고 나와있는데, 제16기계화사단은 개전 당시 제1군단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했으며, 제17기계화사단은 개전 당시 평양에 주둔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서울 점령후 제105전차여단은 사단으로 승격되고, '서울'이라는 명예칭호를 부여, '서울 제105전차사단'으로 불리게 됩니다. 제105전차사단은 한국전쟁 중 일시 해체되었다가 이후 재창설 된 것 같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더군요. 현재의 정식명칭은 '근위 류경수 제105전차사단'으로 불리우고 있다고 하는데.... 류경수는 한국전 개전시 제105전차여단의 여단장이었다죠... 나중에 한국전쟁과 관련해 전범재판이 있다면 반드시 세워야 할 인물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서울 점령 후 (그리고 그 이후) 이 자의 잔인한 학살행위에 대해 다루어 보겠습니다. 팔로군 출신 인민군 군관들의 전쟁범죄는 상대적으로 적다고 할까요.


암튼, 전쟁초기에 105전차여단의 확인은 꽤 정확한 편인데, 다른 축선에서 활동한 다른 전차부대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알려져 있을 겁니다. 하나는 독립전차연대(전차연대를 중심으로 기계화사단 편성까지는 안 갔을 겁니다. 기존 보병부대와의 보전합동 추측도 가능하죠)라는 설과 105여단 전차연대 중 1개 연대를 분할운용했다는 설입니다. 다른 전차여단의 편성은 인천상륙 직전 즈음으로 알고 있는데, 장비 수령 전에 부대편성이 선행되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심지어 105사단의 전차연대 중 하나가 분할운용, 1개 중대규모 차량이 옹진반도에 투입됐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 외에 독립전차연대가 일부 운용된 것은 확실해 보이는데 (그렇지 않으면 숫자 및 운용현황이 맞지 않게 되거든요) 정작 확실히 확인되는 게 많지 않다는 게 문제입니다. 남쪽이건 북쪽이건 기록이 충분하지 않고 미군 역시 당시 정보분석에 헛점이 많았습니다.


어쨌든 이 1개 독립전차연대는 아마도 춘천방면 적 제 2군단 지역에서 단대호 미상인 독립기갑연대가 참전한 사실과도 이어지고, 이 부대의 단대호와 전투서열은 현재 자료로도 확인이 어렵다고 하더군요. 전차식별능력이 없었던 한국군이 SU-76자주포와 혼동한 게 아니냐는 견해가 최근에는 유력하더군요. 아마도 개전시 제 105전차여단이 북한 유일의 기갑부대는 아니였던게 확실해 보입니다.


다만 일부에서 105전차여단 소속으로 알려진 206연대(혹시 독립연대가 아니였을까), 602 모터지크연대(기계화보병연대와 모터화연대는 같은 의미지만 모터지크연대는 오토바이 부대를 의미하니 부대성격이 다르죠), 602 모터지크연대, 208(108)교도연대도 불확실하구요.


저의 추측엔 602모터지크 연대가 일부 책에서 말하는 동부전선 북한군 제 5사단과 공동작전을 펼친 제 12오토바이 정찰연대를 의미한다고 생각이 듭니다. 기계화보병연대라면 BA-64장갑차나 트럭을 보유한 부대를 의미한다고 보니까요. 

다시 바주카로 돌아와서, 


한국전쟁 초기 전차격파 무기 (T-34/85 vs. 2.36인치 바주카) 분석

1950년 7월 20일 대전 시가지 전투에서 끝까지 남아있던 미 제 24사단장 딘 소장이 3.5인치 바주카로 적 전차를 파괴한 일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3.5인치 바주카가 처음 쓰이게 된 것도 대전전투 부터죠.


대전 전투에서 딘 소장은 확실히 1대 격파(3.5인치로)기록이 있습니다. 그 전에 2.36인치를 이용한 공격을 진두지휘하기도 했지만 이건 격파 실패가 확실시되고... 딘이 격파한 전차는 미군이 대전을 탈환한 직후 유기전차들에 대한 전과분석조사 과정에서 고증됐습니다.

딘 소장이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적의 T-34 전차가 시내에 진입시 제34연대 지휘소에 있었으나 통신두절로 전혀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고,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는 실정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무엇보다 당시 미군의 사기저하 문제 때문일 겁니다. 특히 전차공포가 있을 때 으례 발생하는 것이 고급지휘관들의 솔선수범입니다. 

사단장이 돌격선두에 선다거나, 기관총을 직접 담당한다거나, 전차사냥에 동참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런 사기저하문제만 아니라면 고급지휘관은 상황파악이 유리한 지휘소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것이 낫습니다. 물론 기회포착이나 적정확인을 위해서는 전선시찰이 필요하긴 합니다.


실제로 나중에 분석에 의하면, 대전 시내에서 보병의 엄호없이 전차단독으로 작전을 진행하다 이날 모두 10대가 격파되었는데, 그 가운데 8대는 3.5인치 바주카에 의한 것이었으며, 2대는 85mm나 야포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죠. 

어쨌든 이후 3.5인치 바주카가 미군과 한국군에게 공급되면서 전차 공포가 사라집니다. 물론 셔먼이나 퍼싱, 패튼의 전차포는 T-34/85를 격파했다고 합니다. 패튼의 경우엔 T-34/85의 포탄을 튕겨냈다고 하고요.


여담입니다만,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의 기갑부대 운용에도 몇가지 결함이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북한군은 기갑부대를 '전략적'으로 운용하지 못하고 '전술적'으로 운용했죠. 이는 소련군 교리를 따른 건데... 이건 제2차 세계대전시 소련군이 기갑부대를 보병에 대한 근접지원으로 운용한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 겁니다. 북한군은 초전의 기습적 공격에 의한 아군의 저항의지 붕괴에도 불구하고 1주일간 겨우 50마일(80Km)을 돌파하였으며 6월 25일부터 8월 10일까지 40일간 겨우 일일 5-7마일(8-11Km)의 느린 속도로 부대를 진출시켰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적은 별로 큰 지장없이 부산까지 진격을 할 수 있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한강도하후 수원까지 10일간의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였고, 우방군은 이 기간중에 미 24사단을 증원할 수 있었다."라고 증언함으로써 북한군의 실패원인을 초전 성공을 종심깊은 돌파로 신속히 전과확대하여 전략적 승리로 이끌어 가지 못한데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출처 : The Employment Armor in Korea, The First Year(Fort Knox, May 1952), p.46)

리델하트도 북한군이 8월 하순 급히 편성하여 낙동강 전선에 투입하였던 제16, 17기갑여단을 사전에 편성하고, 또한 제2차세계대전시 독일군 기갑부대식으로 통합 편성하여 경부축선 등 어느 한 방향에 집중적으로 투입 종심깊은 돌파와 전과확대, 신속한 추격 등을 실시하였더라면, 미군이 한반도에 투입되기 전에 부산까지 점령할 수 있었을 것이다 라고 분석한 바 있습니다.


(출처 : Liddell Hart "Tank Warfare and It's Future"(Military Review, Nov, 1952, p.74)


마지막으로 1대1 전차전 사례를 찾아보면 흥미로운게 눈에 띕니다. 


북진작전 중 미 제 1기병사단의 금천포위작전에서 있었던 일인데. 1950년 10월 13일, 안개낀 이날 아침에 적 전차대는 연대를 지원하던 미 제70전차대대 B중대의 전초진지 목표로 침투하였는데, 이를 발견한 Maeshell D. Drewery상사는 곧 그의 M-26 Pershing전차에서 50m 거리에 있는 적의 전차에 제1탄을 발사하고, 20m에서 제2탄으로 모두 적의 T-34전차의 포탑부근에 명중시켰으나, 그래도 적 전차는 85밀리주포를 연사하면서 계속 육박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돌진해 미군전차를 들이받았다고 하네요. 다행이 퍼싱전차는 뒤로 물러나려 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충격은 아니었지만 양 전차는 서로 주포로는 사격할 수 없도록 맞붙고 말았다고..


여기서 퍼싱전차는 T-34전차의 뒤로 돌려고 했고, T-34전차는 그렇게 못 하도록 뒤로 물러서자 주포를 사용할 수 있는 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퍼싱전차가 제3탄을 발사했는데 이번에는 적 전차의 포구에 맞아 포신이 파열되고 불길이 일어났으나, 

적 전차는 계속 육박하여 제 4탄을 명중시킴으로써 비로소 파괴되었다고 하더군요.

 Drewery상사의 전차도 수발의 적의 포탄을 맞았으나. 85mm로 관통 피해는 없었으며, 

이날 전투에서 연대와 그 지원부대는 도합 8대의 적 전차를 격파하는데 성공하였는데, 

그 가운데의 7대는 제70전차대대 B중대가 거둔 전과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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