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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중앙도서관 옥상 벤치에 앉아 서울의 아름다운 야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이것도 처음 한두 번 봤을 때나 아름다운 서울 야경이었지, 이젠 그저 휘황찬란한 불빛일 뿐이었다. 오늘이 벌써 며칠 째이던가, 소연이에게 끌려서 중앙도서관에 출근도장을 찍고 있는 것이…….

내가 도서관에 앉아 있다고 해서 시험공부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 책상 위에는 그동안 노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읽지 못했던 소설들과 요즘 관심을 갖고 있는 미술 관련 서적이 너부러져 있었다.

지난 12년간 책상에 앉아 머리만 굴리며 여기까지 왔기에 최소한 1학년 때만큼은 넓은 세상을 직접 몸으로 부딪쳐 보이지 않는 단단한 벽의 위세를 온몸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싶었다. 하지만 소연이는 지난 12년, 아니 그보다 더 길 수도 있는 대학 진학을 위한 삶에 익숙해졌는지 몸에 밴 습관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소연이 때문에 시험공부를 하고 앉아 있는 것은 내 신념에 대한 배반인 것 같았고, 궁여지책으로 또다시 머리만으로 넓은 세상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지친 뇌에 신선한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옥상으로 나온 지 30분쯤 흘렀을까, 내 코앞에 소리 없이 눈웃음을 치고 있는 시은이가 보였다.

“깜짝이야.”

“놀랐어?”

시은이는 어울리지 않게 헤벌쭉 웃으며 내 옆에 자리 잡았다. 시은이와는 몇 번 같이 술을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새침하고 도도해 보이는 시은이의 인상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기 힘들었다. 인상뿐만 아니라 성격도 그리 유하지는 않았다. 똑 부러지는 말투와 직설적인 화법은 마치 날카로운 가시 같았다. 그런 것들이 오히려 시은이를 더욱 빛나게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장미의 가시처럼……. 그런 시은이가 내게 이런 장난을 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갑자기 얼굴을 들이밀어서 놀란 것보다 그게 너라는 게 더 놀랍다.”

“무슨 의미야?”

“그냥…… 넌 이런 장난 안 칠 거 같았거든.”

“그렇긴 해. 지금 생각해보니까 나도 아까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잘 모르겠어. 잠깐 미쳤었나봐.”

“친구 남자친구라고 만만해 보여서 그런 거 아냐?”

“그런가? 근데 여기서 뭐하고 있었어?”

“흘러가는 청춘에 사죄하고 있었지.”

“무슨 소리야?”

“헛소리.”

답답한 내 심정을 털어놓을까 했지만 혹여나 소연이 귀에 들어가 잔소리 들을까봐 멈칫했다. 그저 멋쩍게 웃으며 이 질문을 넘길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을 안쓰러워 할 뿐이었다.

“싱겁긴…….”

“넌 왜 나왔어?”

“머리 좀 식히려고.”

“공부 열심히 했나보구나.”

“그렇지도 않아. 오랜만에 공부하니까 조금만 해도 힘들어서 그래.”

“고등학교 때는 정말 공부 많이 했는데…… 그치? 수능 끝난 지 반년도 채 안됐는데 벌써 그 습관이 사라지고 몇 시간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힘들어하고 있으니 사람이란 참 영악하면서도 어리석은 동물인거 같아.”

“인류가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겠지.”

“진화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겠고?”

“그건 아니야.”

“그런가…….”

나는 웃으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던진 한 마디에 시은이는 정색을 하며 답했다. 역시나 시은이에게는 말 한마디라도 조심스럽게 가려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려던 찰나에 시은이는 까르르 웃었다.

“장난이었어. 너 진짜 내가 되게 어려운가보다. 장난을 못 치겠어.”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조금 속상하다. 난 네가 편한데 넌 날 불편해하니까.”

“아냐. 절대 그런 거 아냐. 나도 네가 편해.”

“치, 이제 와서 그래봤자 이미 늦었네요.”

시은이는 내게 놀리듯 혀를 내밀었다가 집어넣었다. 정말 시은이는 내가 편하게 느껴지나 보다. 우리는 항상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만 만났었기에 지금처럼 단둘이 있으면 어색해 할 줄 알았는데 그러기는커녕 시은이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보여주던 새침때기의 모습은 완전히 감춰버렸고, 오히려 장난끼 많고 약간은 푼수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색함을 떨치기 위해서 억지로 연출하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해맑은 표정이었다.

“빨리 시험 끝났으면 좋겠다.”

“시험 끝나면 뭐 하려고? 소연이랑 데이트하게?”

“그런 것도 있지만 그냥 빨리 시험이 끝났으면 좋겠어. 지금 이 순간이 싫어.”

“이렇게 나랑 같이 있는 게 싫어? 나 내려갈까?”

“아니야. 근래 들어 지금 이 순간이 제일 좋아. 널 만나기 전까지가 정말 싫었다는 거야.”

“거짓말. 소연이랑 단둘이 있을 때가 더 좋으면서…….”

“소연이랑 단둘이 있을 때는 도서관 책상 앞에 앉아 있을 때뿐인데 뭐가 좋겠어?”

“진심이야? 소연이한테 이른다?”

“그 말이 또 소연이가 싫다는 말은 아니잖아. 소연이는 정말 좋은데 책상 앞에 앉아있는 내가 싫다는 거지.”

“그게 그 말이지. 소연이가 널 책상 앞에 묶어두고 있는 거니까.”

내가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시은이가 소연이에게 얘기하더라도 소연이는 진심으로 받아들이지는 않겠지만 날 부려먹을 약점으로 이용할 게 뻔했다. 그런 피곤한 상황은 애당초 벌어지지 않도록 만드는 게 최선이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소연이한테는 암말도 말아줘. 응?”

“생각해볼게.”

“꼭 긍정적으로 생각해줘.”

“그래도 넌 좋겠다. 시험 끝나면 소연이랑 실컷 놀 거 아냐. 난 시험 끝나도 같이 놀 사람도 없고…….”

“왜 없어? 우리가 있잖아.”

“너희랑 남자친구랑 같니?”

“너도 남자친구 사귀면 되잖아. 너 정도면 남자들이 엄청 쫓아다닐 거 같은데…….”

실제로 시은이는 인기가 없었다. 아니, 인기가 없다고 하기 보다는 남자들이 지레 겁먹고 접근을 못한다고 하는 편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우리와 같이 어울리는 동기인 현준이도 시은이에게 호감을 가졌던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대시할 용기가 없어 마음을 접고 다른 동기에게 집적대고 있었다. 이런 케이스가 내가 들은 것만 해도 현준이 말고 두 명이 더 있었으니 시은이가 인기가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두가 시은이에게 선뜻 못 다가간 것은 아니었다. 선배 중 한 명이 시은이에게 영화 보자고 했다가 매몰차게 거절당했다는 얘기를 소연이가 해줬었다. 시은이가 눈길이 가는 외모이긴 하지만 다가가기 힘든 아우라를 풍기고 있는데다가 거절당한 선배 얘기를 전해 들었다면 나라도 쉽게 접근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누구? 누가 나 쫓아다녀? 나도 좀 알자. 가르쳐줘.”

“없어? 그럼 내가 쫓아다녀줄까?”

“이거 위험한 발언인데? 소연이가 들으면 뭐라고 하려나…….”

“야, 당연히 농담이지.”

“난 진담인 줄 알았지.”

시은이가 눈웃음을 치며 날 바라보는데 순간 심장이 쿵쾅거렸다. 시은이가 늘 이런 표정을 짓는다면 정말이지 남자들이 줄을 서서 쫓아다닐 거 같았다.

“농! 담! 이! 거! 든!”

“뭘 그까짓 걸로 정색을 하고 그래?”

“됐고, 외로우면 소개팅 시켜 줄까?”

“나도 됐고, 심심하면 내가 자주 옥상 올라와줄까?”

“여기? 와준다면 좋지. 혼자 서울 야경 쳐다보고 있는 것도 지겨워지고 있었으니까.”

오늘 이렇게 대화를 나눠보기 전까지의 시은이였다면 불편해서 어떻게든 둘러대며 대답을 피했을 것이다. 시은이가 먼저 내게 마음을 열고 다가와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가 많은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닌데 나는 시은이에게 마음을 금방 열 수 있었고, 시은이와 함께 이러고 있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올라올 때 문자해. 쉬고 싶은 타이밍이면 올라와줄게.”

“그래. 대신 커피는 내가 무한제공 해줄게.”

“난 커피 안 마시니까 생과일주스로 준비해줘.”

“6시면 여기 까페 닫잖아. 그냥 자판기에 있는 거 마셔.”

“싫어. 그럼 안 먹을래.”

“좋아. 그럼 지하 편의점에 있는 걸로 말해. 거기까진 내가 갔다와줄게.”

“그럼 덴마크 드링킹 요구르트, 키위나 딸기로…….”

“너 변비 있어?”

“넌 애 낳을 때만 미역국 먹어?”

“변비 없구나.”

시은이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내려갈 거야?”

“응. 가자.”

내려가 보니 소연이는 공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가 옆에 앉든 말든 오로지 책과 노트에만 시선이 가 있었다.

시험이 끝날 때까지 나의 이런 생활은 반복되었다. 달라진 거라곤 읽는 책 하나였다. 시험이 코앞에 닥쳐서는 소설에 눈길을 주지 않고 오로지 시험공부만 했기 때문에 책만 달라졌을 뿐 다른 건 다 똑같았다. 소연이 옆에 앉아 책을 보다가 지겨우면 옥상으로 올라가서 시은이를 불러 수다 떨며 놀고, 그러다가 다시 들어가 공부하는 게 나의 시험기간 생활패턴이었다.

고마운 건 내가 부를 때마다 시은이가 나와서 놀아주었다는 것이다. 시은이마저 없었다면 나는 무슨 낙으로 길고도 긴 시험기간을 버텨낼 수 있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시은이도 공부하기 무지 싫었나보다. 부를 때마다 재깍재깍 나오는 걸 보면 말이다.

그렇게 매일같이 만나서 얘기하고 놀다보니 시은이와 꽤나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소연이보다 시은이가 더 가깝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베프가 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 * *

시험이 끝나기만 하면 마냥 기분 좋은 일들만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시험이 끝난 날부터 지연이 누나와 싸웠다.

지연이 누나는 시험기간 내내 내가 소연이와 붙어 있었으니 주말을 둘이서만 같이 보내자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나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주말 내내 같이 보내자는 말은 밤을 함께 하자는 말이기도 한데, 그 말은 우리의 사랑을 완성시킬 수 있는 기회가 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천금 같은 기회를 내가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오히려 나로서는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환영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동기엠티가 그때 잡혀있는 걸 어떡한단 말인가. 그것도 가겠다고 오래 전부터 소연이와 약속했던 거라 도저히 어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연이 누나는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시험기간에 얼굴도 제대로 못 봤는데 시험이 끝나서까지 소연이와 함께 있겠다는 것이 못 마땅했던 것이다. 사실, 내가 시험기간에 소연이에게 붙들려 있긴 했지만 은근히 자유로웠던 몸이라서 지연이 누나만 원한다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다. 그랬다면 내가 시은이와 베프가 될 일 또한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연이 누나도 소연이와 비슷한 부류의 학생이었기에 날 만날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그동안 먼저 연락한 경우도 거의 없었고, 내가 문자를 보내면 항상 공부하고 있다는 짧은 답문을 보내곤 했었다. 진원이 형을 옆에 앉혀놓고 혼자 계속 공부만 했을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아무튼 나는 지연이 누나와의 다툼은 진행 중인 상태로 마무리 짓지 않고 훌쩍 서울을 떠나버리려고 청량리로 왔다. 지연이 누나가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어차피 이렇게 되어버린 것, 일단 동기엠티를 열심히 즐기고, 다음 일은 다시 서울에 왔을 때 생각하기로 했다.

우리 동기들은 청량리의 마트 앞에서 진을 치고 앉아서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연이는 학생회 활동을 하고 있었기에 엠티 준비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시은이와 담소를 나누며 출발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추 다 모였을 때 과대가 나와 엠티 조를 발표했다.

“3조. 김정호, 김가희, 박수철, 이승훈, 정윤호, 차시은, 최희진”

의외였다. 내 이름이 있는데 소연이 이름이 없다는 게 이상했다. 나는 눈을 돌려 소연이를 찾았고, 소연이는 내가 자신을 찾을 것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날 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어 주었다. 소연이는 조가 이렇게 짜여진 것을 알고 있었다는 뉘앙스였지만 나는 왜 이렇게 되도록 놔두었는지가 궁금했다.

“소연이가 생각이 있어서 그랬겠지. 우리 조 애들이나 모아서 얘기해보자.”

시은이는 별일 아니라는 듯 얘기했다. 나도 일단 시은이 앞에서는 대범한 척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우리 조 애들을 불러 모았다. 펜션에 도착해 먹을 점심과 저녁에 먹을 안주거리를 사야했다.

“일단, 우리 조 점심 뭐 먹을까?”

“간단하게 먹자.”

다들 요리에는 젬병이라 점심은 즉석요리로 해결하는 것에 동의했다. 그리고 저녁에는 고기가 나올 테니 안주로는 만드는 게 아닌 만들어진 것이나 날로 먹을 수 있는 것 위주로 사기로 합의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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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로 들어가 각자 먹고 싶은 즉석요리를 골랐고, 과자나 한치 등 마른안주와 통조림 몇 개를 골라 카트에 담았다. 계산을 끝내고 아까 있던 자리로 가니 우리만 나와 있었다. 시계를 보니 장을 보라고 준 시간까지 아직 20분 넘게 남아있었다.

나는 시은이만 살짝 데리고 다시 마트로 들어갔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씹을 주전부리를 살 생각이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버스에서 먹자.”

“나 일단 목말라.”

“나가서 생과일주스 사서 들어올까? 아님…… 그냥 요구르트 마실래?”

“너 혼자 가서 사오면 생과일주스 마실게.”

“내가 네 몸종이냐?”

시은이는 못내 아쉬운 듯 고개를 떨어트리고 괜히 바닥을 툭툭 차며 말했다.

“그럼 요구르트 먹지 뭐.”

“알았어. 사다줄게. 여기 있어.”

“나 혼자 있어?”

“장난해?”

“농담한 거야. 같이 가자.”

“그럼 과자 먼저 사서 나갈까?”

“그래.”

우리는 과자 코너로 이동했다. 시은이는 이건 이래서 맛있고 저건 저래서 맛있다며 내게 과자 품평을 하고 있었다. 내가 없이 살아서 과자를 한 번도 못 먹어본 불쌍한 아이로 보였나보다. 나도 다 먹어봐서 안다고 빨리 하나 고르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내 가슴 속에 차오르고 있었지만 그 틈을 비집고 내 목으로 새어 나온 말은 시은이 말에 대한 맞장구였다. 시은이가 신나서 얘기하는 걸 초치고 싶지도 않았고, 해맑은 시은이의 모습을 보는 것도 왠지 흐뭇하고 좋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프링글스가 손에 들려져 있는 시은이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시은이도 소연이만큼 먹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근처 테이크아웃 전문점으로 가서 딸기 주스 두 개를 사서 근처에 앉아 마셨다. 시은이는 과자를 고를 때부터 연신 신이 난 표정이었는데 주스를 마시고 있으니 더 기분이 들뜬 것 같았다.

“그렇게 맛있어?”

“응? 으응…….”

“뭐야? 그 뜨뜻미지근한 반응은? 표정은 아주 맛있어 죽겠다는 표정인데…….”

“내가 그랬나? 맛있어, 정말. 기분도 좋고…….”

“이렇게 좋아하는 줄 알았으면 진작 한 번 사줄 걸 그랬나?”

“진작 좀 사주지. 그래도 뭐…… 이렇게 안 잊고 사줘서 고마워.”

“뭘 안 잊어?”

“내가 생과일주스 좋아하는 거.”

진심 기쁜 듯 미소 짓고 있는 시은이의 예쁜 얼굴을 보니 잡스러운 것들을 잘 기억하는 나 자신이 사랑스러워 꼭 안아주고 싶었다. 난 정말 빠질 데 없는 멋진 남자라는 자부심이 솟아오르며 괜히 어깨가 쫙 펴지고 인자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이렇게 좋은 분위기를 소연이가 산산이 부셔버렸다. 출발할 때가 되었다고 아까 있던 데로 빨리 오라는 소연이의 전화에 시은이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시은이와 내가 가자마자 어슬렁거리고 있던 동기들은 일제히 버스를 타러 가려고 움직였다. 우르르 움직이는 군중들 속에 한 사람만이 우두커니 서서 시은이와 내가 오는 걸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어디 갔다 왔어?”

“주스 한 잔 마시고 왔어.”

시은이는 소연이와 나를 뒤로 하고 군중들 속에 묻혀버렸다. 소연이와 나도 동기들과 조금 떨어져 뒤따라갔다. 오늘 처음 봤을 때 잠깐 인사를 나누었던 걸 빼면 처음으로 단둘이 있게 된 것이다.

“시은이랑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

“우리 원래 친했을 걸?”

“웃기시네.”

“질투하는 거예요?”

“아주 잘됐다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네요.”

“근데 왜 우리 같은 조 아니야?”

“그거 일부러 그랬어. 그동안 우리 둘이 붙어 다니느라 동기들이랑 못 어울렸잖아. 너도 동기들이랑 좀 친해져야 될 것 같아서…….”

“네가 오랜만에 나 잊고 동기들이랑 놀고 싶어 그런 건 아니고?”

소연이는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것도 있지.”

소연이가 그동안 동기들이랑 어울리고 싶었는데 나 때문에 못 어울리고 있었나보다. 내가 소연이를 그렇게 얽매어 놓은 것도 아니었는데 괜히 내가 나쁜 놈이 된 거 같았다. 그래서 정말 동기들과 실컷 놀 수 있도록 소연이에게는 아예 눈길도 주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럴 거라고 미리 말해줬더라면 동기엠티를 오지 않고 지연이 누나를 만났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기왕 이렇게 와버리게 된 것 나도 소연이 못지않은 즐거운 엠티가 되도록 열심히 놀 거라고 마음먹었다.

펜션에 도착해서 안을 둘러보니 작은 방 두 개와 욕실 하나, 그리고 주방이 딸린 커다란 거실이 있었다. 생각보다는 작았지만 꽤나 깔끔해서 마음에 들었다. 방 하나에 짐들을 몰아넣고 점심식사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조들은 분주히 준비하느라 정신없었지만 우리 조는 여유 있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각자가 먹을 3분 요리는 물이 팔팔 끓고 있는 냄비 안에서 이미 3분 넘게 담겨져 있었다. 밥은 학생회에서 전체가 먹을 양을 준비했기 때문에 우리 조는 밥만 나오기를 기다리면 되는 것이었다.

학생회 선발대가 미리 와서 밥을 준비했기에 우리는 오래 기다리지 않고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우리가 식사를 끝냈을 때에도 다른 조는 썰고 깎고 지지고 볶느라 정신이 없었다. 소란스러운 펜션을 뒤로 하고 시은이와 나는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서 펜션 곳곳을 둘러보다가 마당 끝 강가까지 갔다.

마당 아래 강둑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나 찾아보니 한쪽 끝에 작은 비탈길이 보였다. 우리는 눈빛으로 내려가 보자는 의사를 주고받았고, 바로 그리로 움직였다. 비탈길은 좁고 경사도 심한데다가 땅도 고르지 않아 내가 먼저 한 발짝 내딛은 다음 시은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은이는 내 손을 잡고 천천히 따라 내려왔다. 우리는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며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강둑에 자리 잡고 앉았다.

“우리도 뭐 만들어 먹을 걸 그랬나?”

“난 이것도 괜찮은 거 같아.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맛없는 거 먹느니 이렇게 우리들만의 자유시간이라도 생기는 게 더 좋잖아.”

“그렇게 생각하니까 안 하길 잘한 거 같네.”

“시은아, 넌 집에서 요리 같은 거 아예 안 해?”

“응. 아직 해본 적 없어.”

“귀하게 컸구나.”

“넌 해봤어?”

“계란 프라이는 가끔 해먹어.”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너 안 해봤잖아. 안 해봐서 그런 소리 하는 거야. 계란 프라이가 얼마나 어려운 요리인데…… 옛말에 계란 프라이를 할 줄 알면 웬만한 요리는 다 할 수 있다는 말도 있잖아.”

“그런 소리가 어딨어?”

“너 또 모르는 소리하고 있네. 내가 처음 계란 프라이 만들었을 때 그렇게 말했었어. 그게 옛날이니까 옛말이지, 뭐.”

시은이는 내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내가 웃어보이자 같이 웃어주었다. 약간은 비웃는 기분이 들었지만 돌을 맞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다음에 기회 되면 내가 맛있는 요리 해줄게.”

“한 번도 안 해봤다면서?”

“연습하면 되지.”

“나한테 요리해주려고 연습하겠다는 거야? 이야, 감동이다.”

“너 때문은 아니고, 나도 시집가야 되니까 조금씩 연습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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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벌써 시집이야. 너무 어색한 변명 아냐? 하긴 네가 나 때문에 요리 연습하는 게 더 어색하긴 하다. 소연이면 몰라도……. 소연이는 요리 좀 하려나.”

“요리는 모르겠고, 빵 만드는 건 좋아할 걸?”

“정말? 나한테 그런 말 안 했는데…….”

빵 만드는 걸 좋아한다면서 내게 한 번도 안 만들어준 것뿐만 아니라 그런 사실조차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는 게 조금 서운했다. 내가 알았더라면 만들어오라고 귀찮게 하긴 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말도 안 해주다니 너무했다. 이렇게 알게 된 이상 한동안 계속 빵타령하며 귀찮게 굴어야겠다.

점심식사가 끝났는지 우리를 찾는 전화가 와서 펜션으로 올라갔다. 과대는 게임을 하겠다며 거실 가운데 서서 시선을 집중시켰다. 과대를 중심으로 각 조별로 둘러앉아 게임이 진행되기를 기대했다.

첫 번째 게임은 무난했다. ‘몸으로 말해요.’라는 게임인데 스피드 게임과 똑같이 단어를 설명하는 건데 말을 할 수 없고 몸으로만 표현해서 설명해서 단어를 맞혀야 하는 게임이다. 몇몇 단어들과 코믹한 자세의 설명으로 간혹 큰 웃음이 터지긴 했으나 전체적으로 소소한 재미를 주는 시간이었다.

두 번째 게임은 커플 게임이었다. 두 사람이 땅에 발이 닿지 않고 신문지 안에 있으면 되는 게임인데, 한 단계가 올라갈 때마다 신문지를 반으로 접어서 서 있을 공간을 줄여나갔다. 우리 조에서는 정호와 가희가 나갔는데 별다른 활약 없이 끝났다.

세 번째 게임 또한 커플 게임이었다. 여자가 바닥에 눕고 여자 위에 엎드려 남자가 팔굽혀펴기를 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과대가 선배들한테 잘못 배워온 것 같다. 굳이 동기들끼리 살을 부비거나 야릇한 자세를 만들면서 친해질 필요가 있을까? 난 참여하지 않을 생각이었기에 무엇이든 간에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바로 소연이가 참여한 것이다. 그것도 지철이와 함께…….

물론 소연이는 지철이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철이는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할 수가 없지 않은가. 나와 소연이가 사귀게 되면서 마음 정리를 했겠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나와는 달리 정말 소연이의 머릿속에는 내가 지워져 있나보다. 엠티를 올 때 다짐했던 대로 소연이에게 눈길을 주지 않으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내 눈은 오로지 소연이만 주시하고 있었다. 이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연이는 생글생글 웃으며 앞으로 나와 다른 여자들과 나란히 바닥에 누웠다.

과대의 신호에 맞춰 남자들이 여자들 위에 엎드렸고, 구령에 맞춰 팔을 굽혔다 폈다하며 여자들 몸에 가까이 다가갔다가 떨어졌다했다. 평소의 지철이는 재밌고 인간성 좋은 녀석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소연이를 덮치려하고 있는 한 마리의 늑대로 보였다. 지철이의 눈은 소연이 위에 쓰러져 누울 타이밍을 찾고 있는 것만 같았다. 보통은 남자가 적당한 타이밍에 포기하며 아무런 일없이 게임을 끝내지만 지철이는 그러지 않을 것 같았다. 이렇게 지금 나는 지철이에 대한 불신으로 가슴이 끓고 있었다.

한 명씩 나가떨어졌고, 지철이와 영식이만 남게 되었다. 두 사람의 팔은 떨려왔지만 괜한 자존심 싸움인지 포기하려는 생각이 없어보였다. 정말 이러다가 둘 중에 한 명이 여자 위에 쓰러지며 끝이 날 것 같았다. 두 사람의 열기는 점점 더해졌고, 지철이의 얼굴에서 흐르던 땀방울이 소연이의 볼에 떨어졌다. 너무나도 불결해 당장이라도 가서 닦아주고 싶었다.

다행히도 영식이가 쓰러지며 내가 우려했던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찝찝한 마음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소연이는 게임에서 이겼다는 사실에 아이처럼 기뻐하며 지철이의 팔을 주물러주는데 기분이 확 상했다.

과대는 계속해서 다음 순서를 진행했고, 나는 또 커플 게임을 하길 바랐다. 선배들한테 잘 배워 온 과대는 우리를 마당으로 끌고 나가더니 역시나 커플 게임을 진행했다. 커플게임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2인3각 게임을 하였는데 나는 소연이에게 보란 듯이 시은이와 함께 참여했다.

시은이와 내 다리를 묶고 나는 시은이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우리는 다정스럽게 꼭 붙어서 구령을 맞춰보며 잠깐의 연습시간을 가졌다. 곧 게임이 시작되었고, 우리는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며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나는 시은이의 손을 꼭 붙잡아 높이 들어 올리며 승리를 자축했다. 시은이도 해맑게 웃으며 승리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나는 슬쩍 소연이를 쳐다보았는데 소연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게 웃어보였다. 그게 더 자존심 상했다. 나 혼자 질투에 눈이 멀어 난리를 치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언짢아진 것이다. 나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발에 묶인 줄을 풀고서도 시은이와 더 다정스럽게 대화를 나누며 우리 조가 있는 자리로 돌아갔다.

줄다리기 등 몇 개의 단체 게임이 더 진행된 다음 저녁식사 시간까지 휴식시간을 가졌다. 시은이와 나는 마당에 있는 의자에 앉아 편하게 휴식을 즐겼다.

“너 소연이가 그렇게 좋아?”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아까 소연이 때문에 그런 거였잖아.”

나는 시은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다 알면서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은이는 그런 내가 우스운지 미소를 머금고 눈을 흘겼다.

“소연이가 부럽다. 네가 이렇게까지 생각해주고 있으니까.”

“소연이도 너처럼 눈치가 빠르면 얼마나 좋을까. 얘는 지금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거 같아. 관심이 없어서 그런 건가……. 차라리 너랑 사귀었으면 더 잘 맞았을 거 같기도 하다.”

“누구 맘대로? 네 맘대로 사귀냐? 내가 눈이 얼마나 높은데…….”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나도 소연이가 백배 좋거든!”

순간적으로 시은이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가 사라졌다. 비교 당해서 기분이 상했나보다. 그래도 시은이는 내색하지 않고 담담하게 넘겼다.

“내가 더 좋은 게 이상한 거지. 너 아니라도 나 좋다는 사람 많아.”

나는 시은이가 들릴까 말까 할 정도로 조용히 웅얼거렸다.

“언제는 없다더니…….”

“뭐라고?”

“아무 말도 안 했어.”

“내 욕 했지?”

“바로 앞에 두고 무슨 욕을 하니? 욕은 뒤에서 해야지.”

“진심인 거 같은데? 뒤에서 내 욕 무지 하나봐?”

“당연하지. 너같이 도도한 아가씨랑 친구해줬으니까 그 정도는 해도 되는 거 아냐?”

“내가 뭐가 도도해? 그랬으면 너 같은 애랑 친구 했겠어?”

“그건 좀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도도한 건 사실이잖아. 남자애들이 너랑 친해지고 싶은데 다가가기 힘들다고 난리야.”

“그거야…… 내가 안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선을 그으니까.”

“그럼 난 선택받은 거야? 이거 좋아해야 되는 건가.”

“당연하지. 넌 신의 축복을 받은 거야. 나같이 예쁜 애랑 친구니까.”

“네 입으로 그런 소리하면 안 민망하니?”

“너니까…….”

나라서 괜찮다는 건가? 역시 우리는 진정한 베프인 것인가, 어떤 말이든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내가 여자와 친구 아니, 베프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남녀관계에서는 친구란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던 나인데 몸소 깨닫고 있었다, 남녀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저녁식사를 하며 시작된 음주는 10시가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었고,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술 마시는 내내 시은이는 내 옆에 붙어있었고, 소연이 옆에는 지철이가 붙어있었다. 이런 이상한 대치상황은 소연이가 균형을 무너뜨렸다.

소연이의 문자를 받고 밖으로 나가니 마당 끝에서 소연이가 내게 손짓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청바지에 남방을 입고 있던 소연이는 언제 갈아입었는지 트레이닝복 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내가 소연이에게 다가가자 소연이는 내 손을 잡고 의자로 이끌었다. 소연이는 술을 꽤나 많이 마셨는지 볼이 발그스름해 있었다.

“술 많이 마셨어?”

“응. 조금, 아니 많이.”

“이제 그만 마셔.”

“쪼끔만 더 마실게.”

“그래. 오늘은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근데 너…… 시은이랑 계속 붙어있더라?”

“시은이 말고는 친한 사람이 없으니까. 재훈이도 안 왔고, 나랑 제일 친한 소연이란 애는 오긴 했는데 아는 체 하지 말래서 놀 사람이 시은이밖에 없어.”

“치, 그래도 다른 애들이랑 놀면 되잖아.”

“너도 지철이랑만 놀았잖아. 커플게임까지 같이 나오고.”

“그거야 네가 시은이랑 그러고 있어서 홧김에 그런 거지.”

예상치 못한 소연이의 말에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나라는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는 줄로만 알았었는데 계속 신경을 쓰고 있었나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평소의 소연이라면 끝까지 내색하지 않고 넘어갔을 텐데 역시 술의 힘이 좋긴 좋은가보다. 이렇게 귀여운 투정을 부리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활짝 웃으며 소연이를 달래주었다.

“우리 소연이 질투 났구나? 질투할 필요 없어. 시은이는 그냥 친구야. 저스트 프렌드!”

다소 억지스럽긴 했지만 미소를 잃지 않고 있던 소연이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지고 진지한 눈빛이 감돌았다.

“나 솔직히 네가 시은이랑 붙어 있는 거 싫어. 시은이 너무 예쁘잖아.”

“시은이가 뭐가 예뻐? 내 눈엔 네가 젤 예뻐. 아니, 너 말고는 예쁜 사람이 없어. 너랑 상대가 안 되는데 뭘 신경 쓰고 그래.”

“정말?”

“당연하지. 나한텐 우리 소연이밖에 없어. 이리 와봐.”

나는 소연이의 허리에 손을 감아 내 몸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소연이와 내 몸은 한 치의 틈도 없이 붙었고, 나는 소연이의 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렇게 예쁜 널 두고 내가 다른 사람한테 마음이 갈 리가 있겠니? 정말 시은이는 친구일 뿐이야. 그래도 네가 싫다면 시은이 안 만날게.”

“그럴 수 있어?”

“물론이지. 만나지 말까?”

그 순간 술에 취하지 않은 소연이가 그리웠다. 겨우 새로 생긴 베프가 사라지게 생긴 것이다. 자기가 안 놀아줘서 만든 베프였는데 그마저도 허락지 않다니 소연이는 욕심쟁이였다. 시은이도 좋긴 했지만 소연이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이므로 소연이가 우선이었다. 소연이의 욕심을 채워주는 게 지금 내가 소연이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라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됐어. 그냥 친구라는데 내가 어떻게 만나라, 만나지 마라 해. 대신 언제나 시은이보다는 내가 우선이야. 알았지?”

“약속해. 시은이뿐만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네가 우선이야.”

나는 소연이의 얼굴에 내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소연이는 얼굴을 살짝 뒤로 빼면서 말했다.

“누가 나오면 어떡해?”

“뭐 어때. 사랑하는 사람끼리 키스하는 걸 누가 뭐라 그래?”

나는 소연이의 머리를 잡고 더 이상 못 물러나게 한 다음 입술을 덮쳤다. 소연이의 혀는 내 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깊고 진한 키스를 나눌 수 있었다. 나는 오늘이야말로 진도를 더 나가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는 아니었다. 여기라면 소연이는 다른 사람들 눈에 띌까 두려워해 나갈 수 있는 진도도 못 나가게 할 것이다. 나는 소연이의 입에서 내 입을 떼며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느끼하게 쳐다봐?”

“우리 저기 강둑 가볼래?”

“갈 수 있어?”

“저기 옆에 가는 길 있어. 가자.”

소연이와 나는 강둑으로 내려가는 비탈길로 갔다. 나는 핸드폰 불빛으로 바닥을 비추며 먼저 앞으로 가 소연이의 손을 잡고 내려갔다. 다 내려가 강둑에 내려서서 소연이를 돌아보는 순간 소연이는 발을 헛디뎌 중심을 잃으며 빙그르르 한 바퀴 돌아 내게 안겼다. 그 모습은 넘어질 뻔 했던 사람의 모습이라기보다는 마치 한 마리의 나비가 춤을 추듯 날아와 내게 살포시 안기는 것과도 같았다. 소연이가 어디서 탱고를 배워 와서 내게 보여주려고 일부러 넘어지는 척 하며 안긴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움직임이었다.

내가 소연이를 뒤에서 안고 있는 형상이 되었는데, 가벼운 소연이의 몸놀림에 비해 나는 어정쩡하게 움직이며 소연이를 잡아주다 한쪽 가슴을 움켜쥐는 꼴이 되었다. 전혀 의도치 않게 소연이의 가슴까지 진도를 나가게 된 것이다.

“괜찮아?”

“응. 너 없었으면 강물로 뛰어들 뻔 했어.”

“안 다쳐서 다행이다.”

“근데 손은 언제까지 거기 둘 거야?”

“어? 어……. 놀라서 손이 붙어 버렸나봐. 안 떨어져.”

소연이는 내 품에서 떨어지려고 했지만 나는 소연이를 더 세게 끌어안으며 소연이의 가슴을 움켜쥐고 손을 떼지 않았다. 소연이의 가슴은 지연이 누나만큼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컸다. 혜림이 누나보다 조금 더 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많이 커서 가슴을 만지는 감촉이 꽤나 기분 좋았다.

“빨리 떼.”

“이러고 잠깐만 더 있음 안 돼? 이렇게 있으니까 마음이 따뜻해져.”

“말도 안 돼.”

“진짜야. 근데 너 아까 여인의 향기에 나오는 가브리엘 앤워 같았어.”

“됐어. 이제 그만 놔.”

소연이는 내 품에서 빠져나가려 했고, 이번에는 나도 순순히 소연이를 놓아주었다. 소연이는 날 흘겨보았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워 나도 모르게 뽀뽀를 해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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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만 나면 뽀뽀하고 키스하고 만질라 그러고……. 미워주겠어, 진짜.”

“그게 다 널 무지 사랑해서 그런 거야. 아무도 못 가져가게 하려면 내 거라고 입술도장 꽝꽝 찍어둬야 될 것 같단 말이야.”

“말이라도 못 하면 얄밉지나 않지.”

나는 헤벌쭉 웃으며 소연이를 꼭 끌어안았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

소연이와 나는 뜨거운 키스를 나누었고, 나는 손을 슬쩍 가슴으로 가져가 조몰락거렸는데 한 번 만져서 그런지 소연이의 제지가 전혀 없었다. 그동안 소연이는 진도를 더 빨리 나가기를 바랐는데 괜히 내가 지레 겁먹고 못 나간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고로 이미 가슴을 만진 상황이긴 했지만 첫 시도에 아무런 제지가 없다는 게 좀 의아해 그렇게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조금 더 진도를 나가도 괜찮을 거 같다는 생각에 나는 티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브래지어 위로 가슴을 만져도 가만히 있었고, 브래지어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가슴을 만져도 소연이는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다.

소연이의 부드러운 살결과 단단하게 서있는 젖꼭지가 손에 잡혔다. 소연이의 젖꼭지는 정말 작았다. 그 작은 젖꼭지가 나와의 키스, 그리고 내 손길에 자극을 받아 단단해져 있다는 게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우리의 키스는 오래도록 지속되었고, 내 손길도 오래도록 소연이의 가슴에 머물러 있었다. 소연이와 내 입이 떨어졌을 때는 서로의 입술과 그 주변은 침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소연이는 날 보며 싱긋 웃으며 입을 닦아주었다. 나도 소연이의 입을 닦아주며 말했다.

“우리 애기 다 컸어.”

“뭐가 다 커?”

“가슴도 이렇게 크고 키스도 잘하고 이정도면 다 컸지. 나한테 시집와도 되겠어.”

“누가 너한테 시집간대?”

“안 올 거야? 그럼 어쩔 수 없지.”

“네가 장가와. 난 안 갈 거니까.”

“그럴까? 그럼 갈 테니까 오늘 신랑이랑 첫날밤 보낼래?”

“어우, 진짜. 생각하는 거 하고는…….”

나는 다시금 소연이의 입술을 덮쳤고, 소연이도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혀로 내 혀를 휘감았다. 내 손은 조건반사적으로 소연이의 티셔츠를 파고들었다. 소연이의 젖꼭지는 말랑말랑해져 있었지만 몇 번의 손놀림만으로 금세 단단해졌다.

내 손은 소연이의 가슴에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이번에 공략할 곳은 소연이의 보지로 마음을 먹고 움직이기 시작한 내 손이었다. 내 손은 소연이의 배를 타고 내려와 아랫배 위에 가만히 올려졌다. 한동안 손가락으로 아랫배를 살살 긁다가 바지 속으로 손을 스윽 집어넣었다. 이상하리만큼 소연이는 아무런 제지가 없었다. 작정하고 온 건지 술기운에 대담해진 건지 모르겠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소연이 보지털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나는 얽어진 소연이의 보지털의 감촉을 팬티 위로나마 느끼며 더 거친 키스를 선사했다. 손을 더 아래로 내리려 했으나 소연이가 오므린 다리를 풀지 않아 보지가 갈라지기 시작한 부분만을 문지를 수밖에 없었다. 다리가 벌어질까 기다려봤지만 그럴 기색이 보이지 않아 가운데 손가락 하나로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소연이의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 더 세게 오므려 더 이상의 손가락을 집어넣기는 힘이 들었다. 난 들어간 가운데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여 소연이의 보지를 자극했다. 소연이는 내 입에서 자신의 입을 떼더니 내 손을 잡아 빼 손에 힘을 주어 꽉 쥐었다.

“너 진짜…….”

“응?”

“이제 그만하고 들어가자.”

“키스 한 번만 더 하고 가자.”

“여태 했잖아. 가자. 안 갈 거면 나 혼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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