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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도 사모님을 생각하지 않았던 날이 없었습니다.”

“그랬군요.”

지영의 대답은 아무 감정이 실려 있지 않은 듯 메말랐다.

그런 지영의 모습에 진수는 약간 당황했다.

“끝난건가요?”

“무슨 말씀이신지....잘 모르겠네요.”

지영은 진수의 말을 잘랐다.

진수는 그런 지영의 모습이 더욱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지영과의 하룻밤....그날 보았던 지영의 아름다운 나신이 생생했다.

지영이 입고 있는 검은 드레스 안에 숨겨진 마력적인 지영의 알몸이 떠올라 후끈 달아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기다린다면....부담 될까요?”

“글쎄요....”

“그 말은....기다리라는 말로 들을께요..”

“..........”

지영은 굳이 대답할 의무감을 느끼지 못했다.

사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스스로의 마음을 잘 몰랐다는 것이 더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영이 진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날밤...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준....

하지만 지금 지영은 자신과 섹스를 나눈 진수를 보면서 아무런 느낌을 갖을수 없었다.

지난밤 정말 뜨겁게 육체를 불살라 버렸던 영식과의 섹스.....

그리고 남편의 차가운 태도...

상반된 두가지의 상황이 지영을 더욱 냉정하게 만든 듯 했다.

“여전히 아름다우시네요..”

“고맙네요.”

두 사람의 대화는 지영의 남편이 돌아오면서 더 이상 이어질수 없었다.

서울로 돌아온 지영은 한동안 비워 놓아 싸늘해진 집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커다란 거실에 우두커니 앉아 있으려니 왠지 낯선집의 모습에 안정이 되지 않았다.

남편은 회사일로 인해 다음날 올라 온다 했다.

남편과 있던 지난 이틀동안 지영은 마음이 점점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는 작은 미련이 사그라 들어 이젠 담담해지는 자신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었다.

지영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린 시절 돌아가신 부모님은 간신히 학교를 졸업할 정도의 유산을 남겨 주었기에 지영은 열심히 공부를 했지만 남편과의 결혼 이후로 십년의 세월이 지나가면서 지영은 사회에서 격리당한 느낌이 들었다.

혼자 남은 삶을 살기위해 열심히 공부하느라 그리 많지 않은 친구들도 이젠 거의 연락이 닿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결혼생활이었던 지영에게 남편의 냉대는 커다란 절망이었다.

아이라도 있었으면 아이를 보면서 살아가련만 지영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음날 올라온 남편은 역시 낯설었다.

저 사람이 십여년전 자신을 그렇게 사랑한다면서 따라다니던 그 사람인가 싶었다.

같이 있는 일주일동안 남편은 아침 일찍 나가 밤이면 술에 쩌들어 귀가를 했다.

게다가 파견 나가기전부터 시작된 각방생활은 여전해 남편은 지영이 있는 안방으로 출근을 위해 옷을 갈아입는 것을 제외하고는 들어오지 않았다.

지영 역시 그런 남편의 모습에 점점 적응이 되는 듯 했다.

갑자기 울린 전화벨에 지영이 천천히 수화기를 들었다.

“나야....”

“네...”

“오늘 저녁 시간 되지?”

남편은 별 다른 설명 없이 지영을 데리고 변두리의 한 식당으로 갔다.

정갈하게 한복을 차려 입은 여인들이 다소곳하게 음식들을 차려 놓았다.

“음.....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

“........”

남편은 심각해진 모습으로 말을 꺼냈다.

지영은 남편의 말에 몸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나도 참 당황스러워..”

“말씀하세요.”

“내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나?”

“네....어린 시절 돌아가셨다고...”

“그래...그렇게 이야기 했었지...그런데..사실 그런것이 아니었어.”

“....”

지영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하는 남편을 바라 보았다.

“어린 시절 우린 무척 어렵게 살았어.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인해 집안은 부도가 나고 빛쟁이들이 밀려 들어 난리를 치고...”

지영은 뜬금없이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는 남편의 말이 의아해 졌다.

“아버지는 그런 빛쟁이들을 피하기 위해 집을 나갔고, 당시 중학교에 다니던 나와 어머니는 빛쟁이들을 피해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해야만 했지.....이젠 다 해결되니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아버지는 연락이 안되고....”

“네....”

“그런데....며칠전 연락이 왔어...아버지한테...”

“살아계셨던 건가요?”

“응...많이 혼란스러워....”

“그렇겠네요..”

“일본에 사셨다는데....어려움이 많으셨었나봐...”

“네....”

“난 그 날 이후로 점점 아버지를 미워했어....차라리 같이 어려움을 겪었더라면....”

“네....에..”

“살아있더라도 다신 보지 않겠다는 다짐도 했었지...그런데 막상 연락을 받고 보니....휴....”

“어떻게 하실건가요?”

“잘 모르겠어...뭐...대충 사는건 괜찮으니 내 신세는 안 지실듯 한데...”

“....”

“두번정도 보긴 했는데...볼때마다 괴로왔던 시간들이 생각이 나....울화가 치밀더군...”

“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오셨나봐...부담은 갖지 말고 그냥 인사나 해...”

“아버님을 만나기로 한건가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그냥 한번 같이 보는게 좋을거 같아서..”

문이 열리자 지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셨어요....지영아 인사드려....아버지야..”

“한지영입니다.”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든 지영은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남편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는 중년의 남자.....

영식이었다.

가슴이 뛰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여보....왜.....”

지영은 노랗게, 그리고 검게 변해가는 하늘을 느끼면서 서서히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일주일 후 남편은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다시 혼자 남겨진 지영은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남편의 아버지가 영식이었다니....

있을수 없는 우연과 악연에 지영은 괴로와 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떠오르는 영식에 대한 생각은 끊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달 후 지영은 슈퍼에 다녀오다 앞집이 이사를 가는 것을 보았다.

별로 내왕은 없었지만 가끔씩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인사는 하던 집이었었다.

며칠 후 지영은 벨소리를 듣고 현관으로 다가갔다.

“누구세요.”

“접니다.”

지영은 잊을수 없는 그 목소리에 가슴이 덜컥 내려 앉으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많이 놀랐지...”

“...........”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잔을 사이에 두고 지영은 영식과 마주 앉았다.

하지만 지영도 영식도 아무말도 할수가 없었다.

“앞집으로 이사왔어.”

“네....”

왜냐고....왜 그랬냐고 묻고 싶었지만 지영은 그 말조차 꺼낼수가 없었다.

“그냥.....가족이니까......같이 살지 못한다면....근처라도...”

“네....”

지영은 머리속이 하얘져 아무말도 할수 없었다.

“이렇게 될줄은....”

“아니..아니예요....”

“그래....잊자...우린.....그래야지..”

말끝을 흐리는 영식의 태도에 지영은 가슴이 아려왔다.

“아빠.....”

“그래.....진짜..아빠가 되었네...”

지영은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그런 지영의 모습을 영식도 아픈 가슴을 억지로 참으면서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식사하러 오세요. 굶지 마시고요.”

그렇게 지영과 영식의 묘한 관계는 시작되었다.

서로를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 둔 채 겉으로는 웃으면서 서로를 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음과 육체는 꼭 일치 하지 않았다.

지영으로 인해 여인을 다시 알게된 영식은 지영을 볼 때마다 불쑥불쑥 튀어 오르는 욕망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했고 지영 역시 그날밤의 잊지 못할 섹스가 생각날때마다 영식을 대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다.

어느날은 목욕을 하고 나온 싱그러운 지영의 모습에 영식은 자신도 모르게 아래도리가 발기되어 어정쩡한 자세로 말도 안되는 핑게를 대면서 집으로 돌아갔고 그런 영식의 불거진 아랫도리를 살짝 보게 된 지영 역시 영식의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애써 노력했다.

그렇게 서로에 대한 욕망을 억제하면서 지내던 어느날 둘의 관계가 변한 커다란 사건이 일어났다.

여느날처럼 영식의 아침을 준비하던 지영은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구토감에 화장실로 뛰어갔다.

그러나 심한 구역질에도 불구하고 나오는 것은 별로 없었다.

문득 지영은 자신의 생리가 없어진 것을 깨달았다.

마지막 생리를 한지 오십여일이 지났지만 평소에도 자주 있었던 생리불순에 지영은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었지만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임신입니다. 두달정도 된것 같네요.”

지영은 현기증을 느꼈다.

‘어떻게...이런일이.....’

집으로 돌아온 지영은 한동안 집안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지영은 정말 아기를 가지고 싶었고 그 아기를 가진 것이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이 너무나 사랑하는 영식의 아이였고 그것은 고민할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영식에게 이야기를 할 것인지....그리고 영식의 반응이었다.

남편에 대한 걱정이나 고민은 별로 들지 않았다.

미국으로 떠난 이후 단 한번도 전화조차 하지 않는 남편이었다.

결정을 내리고 나니 지영의 마음은 너무나 편해졌고 기뻤다.

여지 없이 여섯시가 되자 벨이 울렸다.

“오늘도 고생하셨어요. 아빠...”

생글생글 웃으면서 반기는 지영의 모습에 영식은 기분이 좋았다.

그날 이후로 지영과 영식은 서로 노력을 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장벽은 너무나 굳건했고 쉽게 무너지지 않았기에 어색한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지영은 너무나 예뻤다.

“씻고 오세요. 식사 준비해 드릴께요.”

영식의 상의를 받아 옷걸이에 걸면서 지영이 말했다.

간단히 샤워를 마친 영식은 식탁에 앉아 식사를 준비하는 지영의 뒷모습을 보았다.

약간 헐렁한 하늘빛 원피스를 입었지만 움직일 때마다 살짝살짝 비치는 지영의 몸매는 너무나 아름다왔다.

올린 머리탓에 보이는 서늘한 목선또한 일품이었고 원피스 아래 드러난 하얗고 가는 종아리의 선은 언제나 영식의 눈을 황홀하게 했다.

“같이 안 먹니?”

“네....괜찮아요..속이 안 좋아서..”

싱긋 미소를 지면서 말하는 지영의 모습에 영식은 가슴이 울렁거렸다.

식사를 마친 영식에게 향기 좋은 국화차 한잔을 놓은 지영이 영식을 바라보면서 연신 미소를 생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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